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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민주주의를 위한 정치개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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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대하여 고민하며 정치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이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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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다큐 스페셜 6부작 '도자기'

이 항목의 스프링노트 원문주소

 

 

개요
  • KBS 다큐 스페셜 6부작 '도자기'

 

 

주요내용

 

 

 

Disc 1. 흙으로부터(Origins)

지금으로부터 만 년 전, 고대 사람들은 최초로 흙에 불을 가해 저장용기를 만들었다.

그것이 인류 최초의 그릇, 토기였고, 이것은 지역 간의 교류가 발생하지 않았던 시대 놀랍게도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로부터 자기가 탄생한 곳은 중국이 유일했다. 모두가 동일하게 출발했지만 중국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자기의 탄생, 그 엇갈린 역사적 운명의 배경을 밝힌다.

 

유약은 중동에서 발견 1000년이상 앞섬

동양에서는 자연유약을 발견

나무를 이용한 유약을 개발해감

 

 

Disc 2. 신비의 자기 (Destiny)

중국에서 자기문화를 꽃피운 것은 宋나라였다.

12C 중국에서도 고려청자의 비색은 최상품으로 평가받는다. 기술적, 미적으로 완성된 청자. 그것은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아프리카 대륙까지 신비의 그릇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다양한 에피소드를 역사에 남겼다. 비단이 육지의 실크로드를 열었던 중국자기. 그 교역 루트를 되짚어 본다.

청자이야기

 

 

Disc 3. 이슬람의 유산 (Blue & White)

유라시아 대륙 통일국가 대원 제국의 성립으로 중국내 자기문화는 혁명적 변화를 맞는다. 흰색을 선호하는 몽고의 전통에 따라 백자가 화실자기가 되었고 대제국에 편입된 이슬람 인들은 코발트 안료를 가져와 백자 위에 붓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신대를 열었다. 14C 중국이 만들었지만, 청화백자에는 이슬람 문명의 잔영이 깊숙이 드리워져 있었다. 코발트를 전해준 이슬람인들은 그로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다양한 문명과 기형을 적극적으로 반영시켰던 것이다. 그릇 위에 이룬 문명유합, 그 필연적인 교집합을 살펴본다.

청화백자의 등장

자기에 붓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건 700년전

1300도 이상 을 견딜수 있는 안료

청, 동, 코발트

당초문 - 여러 문명이 함께 만들어낸 문양(37분경~

이집트의 포도문양

그리스의 도기

그리스에서 동로마로 전해짐

이슬람의 문양 - 후기 로마로부터 물려받아 발전시킴

꾸란이 동물을 금지했기 때문에 식물문양이 사용됨

아라베스크 식물 문양

불교와 함께 당초문이 중국에 전해짐

코발트가 들어오고 나서야, 그려내기 시작함

15세기까지 문명의 전달자는 유목민족

이슬람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중간에 위치한 중요한 전달자

이슬람은 결국 청화백자의 모양, 물감, 무늬를 모두 전해줌

 

왜 고려에서 조선에서 넘어가면서 청자에서 백자가 되는가?

몽골의 세계지배와 그들의 흰젖 숭상과의 관련성

1368년 이슬람과 중국을 연결했던 원이 멸망하고 한족의 명이 등장

개방적인 명의 영락제, 쿠빌라이의 후계자로 불림

이슬람계 정화의 원정을 지시함

청화백자와 비단이 명이 세계에 배푸는 하사품

인도네시아에서는 해마다 삼보축제가 열림

청화백자는 이슬람과 중국이 함께 만들어, 두 세계를 모두 만족시키는데 성공함

 

 

Disc 4. 청화의 제국 (Empire)

1499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한다. 후추를 창아 왔던 그는 회항하는 함선에 청화백자를 싣고 돌아갔다.

200년 전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그 존재를 알렸던 자기는 이로써 유럽에 본격적으로 전해진다. 중국 자기를 사기 위해 스페인 갤리언선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했고 황실들은 앞다퉈 자기방을 마련했다. 500년전 유럽에 불어닥친 쉬누아즈리 그 열풍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한다.

 

대항해시대의 개막 - 청화백자 유럽을 강타하다

콜럼버스의 메모

명대 청화백자

징더젠의 도자기 생산은 60단계로 분업화됨

오스만투르크가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길을 막게 됨

1498년 바스코 다가마

인도의 후추

예수의 열두제자중 한명인 토마스는 인도에 와서 기독교 전파

포르투갈은 마카오에 주둔지를 건설

 

스페인은 아메리카에서 은광을 발견

사카테카스 은광

아말감 기법으로

페소가 기축통화의 위치를 차지하게 됨

만리장성은 명대에 축조

여기에 필요한 은화가 바로 중국의 재정

도자기가 바로 이 은화를 불러들인 것임.

코발트에 망간을 섞는 기술이 개발됨

멕시코 아카풀코는 16세기 세계 최대의 무역항

스페인의 배는 도자기를 구입하기 위해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1000척의 배가 태평양횡단

필리핀에서 아카풀코를 잇는 그림

스페인과 멕시코 귀족에 번진 청화백자 장식벽

 

암스테르담 북유럽 무역의 중심

자기 무역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네덜란드

중국 자기를 수입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무역항을 하나씩 빼앗기 시작함

북극을 돌아 중국에 가려했으나 빙해때문에 실패

남아공 케이프타운은 네덜란드의 중요한 거점

물과 같은 자원을 공급받는 곳

네덜란드 정물화에 나타나는 중국 자기의 모습들

네덜란드는 중국에 자기를 주문하기 시작함

사백년전 자기는 유럽이 중국을 바라보는 창

 

독일

17세기 유럽에서 중국 열풍이 일어남

시나즘?

18세기 유럽에서 궁전 장식은 청화백자가 사용

 

 

Disc 5 도전의 세기 (Rivalry)

르네상스를 후원한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자기실험이 실패하는 동안, 일본은 임진왜란 때 데려간 조선도공에 의해 자기 제작에 성공했다. 이로써 일본 아리타 자기는 중국의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한다. 한편 17C 이슬람으로부터 유럽에 커피가 전해진다. 이단의 음료는 교황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퍼져가면서 자기시장의 확대를 불러온다. 확장일로의 자기 시장을 고스란히 중구과 일본에게 내줬던 유럽은 마침내 1709년 과학과 실험으로 그 비밀을 벗긴다.

르네상스는 고전문명의 번역에서 시작됨

메디치가는 1100도까지밖에 못 올림

메디치 자기

스페인의 플라멩고는 이슬람의 음유시  자만? 의 발전

이슬람은 1490년 스페인에서 쫓겨나지만 도기 기술을 남기고감

담벽을 자기로 장식하는 것은 이슬람의 전통 (이것이 전 유럽으로 전파?)

 

네덜란드 델프트에서의 도전

델프트 도기는 유럽에서 중국자기의 싼 가격의 대용품

그러나 도기와 자기의 차이를 이해해야 함

유럽의 대항해시대는 언제나 새롭고 귀한 것에 열광

16세기에는 후추

17세기에는 차와 커피

마시기 위해 찻잔과 커피잔이 필요해짐.

1644년 네덜란드 상관에서 보낸 편지. 중국에서 일어낸 전쟁을 언급함.

명청교체기

대륙밖으로 쫓겨난 반란군을 막기 위해, 청은 해금령을 내림

이와함께 징더젠에 대한 황실의 지원도 중단, 해외수출길도 막힘.

15년간 동인도회사는 재고품으로 버티면서 중국의 자기생산을 기다리다가 새로운 생산지를 찾아나섬.

큐슈의 나가사키에 도착하게 됨

나가사키는 중국, 네덜란드, 일본 상인들이 모이는 새로운 무역중심지로 떠오르게 됨

1659년 네덜란드는 일본에 자기를 주문함. 중국이외에 주문서를 받은 최초가 됨.

일본은 전통적으로 다완을 귀하게 여겨왔음.

전국시대에 이도다완이 유행하게 됨

내부가 우물을 닮았음

조선에서 만들어진것

세계적으로 백여개 남은 것은 모두 일본에 있음

우연성이 만들어낸 아름다움

조선의 도자기에 대한 환상이 여기서 생겨남

1500년대 일본의 영주들 사이에는 다도가 유행함

차문화와 예법이 유행

조선에서 만들어진 다완이 유행

임진왜란 히데요시는 도자기 장인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림

16세기에 자기를 만들 수 있는 곳은 중국과 조선, 베트남

역대 도자기 경매사에서 조선의 철화백자가 최고가

중국을 거쳐 수입된 중동산 코발트로 청화백자를 만들어 왕실용으로 사용

경기도 광주는 자기제작의 메카 3500명의 장인들이 있음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생산기반이 완전히 무너지게 됨

1000명 숫자는 일본으로 건너감 당시 자기 생산이 가능한 거의 전부의 도공을 말함

제례에 올릴 청화백자 술잔이 없다는 기록

1616년 아리타에서 백자 생산이 시작됨

조선에서 도공들이 건너간지 불과 30년만에 유럽의 주문을 받는 것이 가능해짐.

두채자기

1400년대 명에서 개발

1300도에서 코발트를 사용한 청화백자를 만들고 유약위에 채색을 함

그 다음 다시 1000도에서 구우면 됨. 그보다 높아지면 코발트를 제외하고는 날아가버리기 때문

오채자기

두채자기

코발트로 윤곽을 그리지 않고, 자기표면에 여러색깔로 그린 자기

유약위에 그림을 그리면서, 선명한 그림을 얻을 수 있게 됨

중국이 아닌 일본에서 채색자기가 발달하게 됨

자기의 흰색을 얻기 위해서는 불완전연소를 계속하게 해서, 흙속의 철분이 산소와 만나지 못하게 해야함

이마리 자기 유럽시장을 강타하게 됨

17세기 말 중국이 자기 생산을 시작했을 때, 독점적 지위는 이미 사라지고 경쟁체제로 들어감

중국에서도 이마리 자기를 모방하게 됨 차이니즈 이마리

당시 유럽은 세계무역을 통해 풍요를 누리고 있었음.

커피와 같은 음료를 마시는 것이 그들이 즐기는 호사

여기에 품격을 더한 것이 바로 아시아에서 온 자기

커피잔에 손잡이를 붙인 것은 징더젠

받침과 주전자를 만든 것은 아리타

일본과 중국 두 국가의 경쟁이 지금의 커피잔 세트를 만들어 낸 것

17세기까지 유럽은 손으로 집어먹었음

자기가 식탁문화를 변화시킴

모두가 후추를 즐길수 있게 되자

매너로 자신들을 차별화함

유럽에서는 직접 자신들이 원하는 접시를 주문하기에 이르게 됨

1706년 독일의 아우구스트2세는 연금술사에게 금만들기 대신 자기만들기를 명령

독일의 마이센에서 백자 생산에 성공

 

 

 
Disc 6 문명을 넘어 (Beyond)

유럽최초로 자기를 발명했던 독일. 그러나 천 년간 기술을 독점했던 중국과 달리 유럽 전역에는 불과 50년 만에 자기 기술이 퍼져나갔다. 400여개로 분할된 국가들의 치열한 경쟁이 산업스파이를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유럽자기는 급격하게 성정했고 불과 300년 만에 종주국 중국을 넘어선다. 서구 중심의 현대문명의 지형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는가? 도자기란 창을 통해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한다.

 

 

 

안료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옛 도자기의 표면에 그려진 그림의 색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파란색-코발트, 갈색-철, 붉은색 - 동

 

 

메모

문명의 교류와 융합의 역사, 도자기 http://www.havein.com/bbs/view.php?id=board&page=9&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20&PHPSESSID=f2b8807aa71adf0de05cc7ce67797f76
1.
  지난 2004년 11월 7일부터 12월 12일까지 매주 일요일마다 KBS 스페셜 다큐멘터리로 ‘도자기’ 편이 제1부작 ‘흙으로부터’에서 6부작 ‘문명을 넘어’까지 방영되었다.(*2005년 방송위원회 대상을 수상하여 3월 16(수)일부터 매주 수목요일에 재방송됨) 이 프로는 문명교류사적 시각에서 도자기의 실체와 위상을 총체적으로 조망한 역작이었다.
  문명이 교류하는 것은 문명이 지니고 있는 속성의 하나인 모방성 때문이다. 문명은 일단 생겨나면 주위에 퍼질 뿐 만 아니라, 주위의 문명과 교류하면서 필요한 것은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들어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형성한다. 도자기의 역사는 이러한 문명의 형성과 교류의 과정을 잘 알게 한다.     
  토기 제작으로부터 도기 제작, 그리고 섭씨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자화(磁化)하는 자기를 만들게 되고, 오늘의 우주선에까지 도자기 제조 기술이 이용되는 과정은 인류사가 도구를 사용하고 제조하는 기술의 발달과정의 핵심이자 대륙간의 문명의 교류사이자 변천사이다. 현대 중국 사상계와 미학의 거인 리쩌허우(李澤厚)의 말처럼  “역사 과정 속에서 결정적인 요인은 결국 인간의 물질생활과 의식주행이며, 물질생활과 의식주행 가운데 결정적인 요인은 결국 생산력과 과학기술”인 것이다.   
 
2.
  신석기 시대 정착문명을 발생시켰던 인류 최초의 저장도구인 토기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토기와 도기의 역사는 BC 6000년경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햇볕에 말린 토기(土器)였지만 곧 불로 굽게 된다. BC 5000경에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자르모 유적에서 출토된 ‘각문 토기’는 가장 대표적인 예다. 한편 이란 고원에서는 BC 4000년경에 ‘채문 토기’가 만들어졌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BC 4000년경 테베 근처의 바다리에서 ‘블랙 톱’이라 불리는 흑두적색토기가 많이 제작되었다. 뒤이어 띠 모양의 기하학적 문양 외에도 동물·식물·물고기 등을 그린 ‘채문 토기’가 다수 제작된다. 이들 토기들은 노천 소성으로 구워졌으며, 따라서 소성 온도도 600도 정도였다. 
  그 후 윗부분이 열린 통가마가 출현하면서 섭씨 1000도 정도로 소성온도를 높일 수 있게 된다. 이 통가마는 인류가 발명한 열효율을 높이는 첫 번째 구조물이었다. 이로부터 인류는 도기(陶器)를 구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바얀마을에서는 지금도 이러한 원시적 형태의 통가마로 도기를 굽고 있다) 이 진전된 불 기술은 광석을 녹이는 기술과 깊은 상관관계를 맺으며 문명 발달에 크게  공헌한다. 
  이집트의 고왕국 시대에 청색이나 청녹색의 ‘시유 도기’와 타일이 제작되는데, 이는 토기에서 도기로의 기술발달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 도기도 완벽한 방수가 되지 않아 물을 흡수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고대 서아시아에서는 유리 제작기술을 발명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한다. 그들 서아시아인들은 사막의 모래와 소다와 소금이 섞이면 녹는 온도가 내려가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유리 제작 기술을 발명했다.
 
   7세기 초에 이슬람 제국이 발흥하면서 7세기 중엽에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이집트를 정복하였고, 8세기 초에는 지중해의 이베리아 반도를 그 지배 하에 두었다. 이처럼 영토가 확장되면서 이슬람 도기도 많이 제작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마호메트가 금은 제품으로 만드는 사치를 금하여 도기의 수요가 증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슬람의 사원과 궁전 공공 건조물의 내외를 시유 타일로 장식하였기 때문이다.
  바빌론의 <이슈타르 문, 이슈타르는 사랑과 전쟁의 신을 뜻하며, 이 문은 현재 독일에 옮겨져 있음>도 서아시아 특유의 뛰어난 기술로 만든 도기 타일로 2500년의 세월동안 선명한 색깔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기술을 가졌음에도 그들은 자기를 만들 수 없는 자연환경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1100도 이상에선 녹아버리는 그들 지역의 흙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아시아 지역은 최근에 이르기까지 끝내 자기를 제작하지  못하고 도기의 제작에 머물고 만다. 
 
3.
  고대 문명 중 황하문명은 가장 늦게 이루어졌다. 물론 중국에서도 자생적으로 토기와 도기와 제작이 이루어져 은대에 이르면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도기를 만들게 된다.
  서안시 외곽의 진시황릉과 호남성 장수 지방의 마왕퇴 무덤 출토품들은 이미 BC 200년경 뛰어난 도기 제작술을 획득했음을 알려준다. 진시황릉을 엄호하는 실제 사람 크기이면서도 제각기 다른 얼굴의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도용(陶俑) 8000개를 탄생시킨 중국 도공들의 기술 혁신은 새로운 도자기술을 예고한다. 이들의 평균 신장은 180cm인데 이 크기로 제작하려면 실물크기는 2m 크기로 만들어야 한다. 소성과정에서 크기가 수축되기 때문이다. 또한 온도도 서서히 높여야 하고 온도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뒤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100년 뒤 만들어진 마왕퇴 고분에도 그들의 기술혁신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고민이 숨겨져 있다. 이 때만 하더라도 중국은 아직 자기(磁器)를 만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미국 워싱턴 동아시아 박물관 프리어 갤러리에는 한 백도가 소장되어 있다. 이 도기가 고령토로 구운 최초의 도기이다. 기원전 13세기, 즉 은왕조(BC1400-1200) 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이 유물은 중국이 왜 세계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국에서 세계 최초로 당대 최고의 하이테크 상품인 자기를 만들 수 있었는지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다. 인류공통의 염원이었던 자기는 어떻게 발생했을까?
  이 도기의 태토인, 나중에 자기의 태토가 된 고령토는 암반 아래에서 채굴하여. 빻은 다음 물에 침전시켜 나온 채로 거른 고운 흙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령토는 그전까지의 도기 태토보다도 점성이 높아 얇고 섬세한 성형이 가능했다.   
  7세기 초(1400여년전)  중앙아시아 국가 우기로 시집을 간 중국의 황녀 푸테스바라는 혼수품으로 방직기와 누에씨를 머리 속에 감추어 몰래 가져간다.(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목판화에 이러한 사실이 남아 있음) 이로써 사막에 길을 냈던 중국의 비단 독점을 깨진다.    그러나 중국으로 향하는 서아시아 대상(隊商)들의 발걸음은 계속 이어진다. 실크에 이어 두 번째로 나타난 교역품인 도자기 때문이었다. 신비로운 그릇 하나가 지역과 대륙 그리고 토착 문화와 관습을 넘어 문명 교역의 주된 매개체가 된 것이다. 
  천 년 전, 실크로드 교역의 종착지이자 출발점으로 번영을 누렸던 당의 수도 장안. 사막을 건너 도착한 장안에서 서아시아 상인들은 놀라운 사실을 목격한다. 그들이 알지 못했던 투명하고 청결한 그릇인 도자기를 중국인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는 좋은 흙과 섭씨 1300°C이상의 온도의 융합으로 만들어진다. 경사진 언덕에 만든 오름가마는 굴뚝 역할을 해서 높은 온도로 자기를 구워지는 자기를 만들게 한다. 그리고 높은 온도는 흙의 성질을 변화시켰으며, 이것이 이른바 액체의 고체의 중간 상태에서 일어나는 자화(磁化)이다. 이것이 세계에서 최초로 1700년전 중국의 저장성 웨저우(越州), 한 호숫가에서 이루어진 자기의 탄생이었다.
  인류역사상 중국인이 세계 최초로 당대 최고의 하이테크 상품인 자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때까지 인간이 만든 가장 뛰어난 그릇이었으며, 당연히 인류문명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 후 중국은 송(宋) 대에 이르러 당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자기가 대중화될 정도로 도자기 만드는 기술이 발달한다.
  천년 전 송(宋)의 수도는 카이펑이었다. 송나라는 문인들을 우대했으며, 문화와 경제력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래서 대도시를 중심으로 상업과 무역이 성행했다. 이러한 사실은 <청명상하도>란 두루마리 그림에 잘 나타나있다. 이 그림은 춘절을 앞둔 카이펑 시내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손님들이 자기 그릇으로 차를 마시는 장면도 그려져 있다. 당시 카이펑은 인구 50만명으로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당시 런던의 인구는 5만명이었고, 로마는 만 2천명 정도였다) 당시 송은 도자기를 소비하는 유일한 나라였던 것이다. 
  그리고 황궁에 납품하는 자기는 이른바 5대 관요에서 만들어졌다. 5대 관요는 여요, 균요, 가요, 관요, 정요 자기를 말하는 데 이 중에서 정요에서는 백자를 생산했다. 그래서 당시부터 청자와 백자의 우위를 가리는 논쟁이 치열했다. 그러나 이러한 당시 황제였던 휘종에 의해 더 이상 논란이 되지 못한다.
  그 자신 그림과 글씨에 능할 정도로 문화적 소양이 탁월했던 휘종의 ‘우과천청(雨過天靑), 즉 ‘비갠 후의 하늘빛과 같은 청자를 만들어라’라는 명에 따라  녹색을 넘어 푸른빛을 띠는 자기를 만드는 것이 지상과제가 된 것이다.  바로 1300도의 고온에서 유약이 푸른색의 유리질로 바뀐 것이다. 두꺼운 유약 층의 굴절과 기포가 빛의 산란을 유도해 푸른 빛을 내게 된 것으로 이는 호수에 고인 물이 기포의 반사로 푸른빛을 내는 이치와 같은 것이었다. 
  중국의 자기를 실은 함선의 출발지는 남송의 전통 무역항 천주였다. 천주를 출발한 중국의 정크선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도착한다. 자카르타에 도착한 청자는 이곳 사람들에게 신비의 그릇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청자를 갈아서 해독제로 사용하는 풍습이 생겨나기도 했다고 한다)
  자카르타를 출발한 정크선이 도착한 곳은 인도였다. 힌두교 교리에 따라 형성된 계급제도 인 카스트는 이곳 사람들에게 계급마다 그릇을 엄격하게 분리해서 사용하게 하며, 한 번 사용한 그릇은 반드시 폐기 처분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문화적 관습을 중국의 청자는 넘어선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 페르시아 만으로 건너간 청자는 깨지면 철사로 봉합해서 쓸 만큼 소중한 물건이었다.
  이러한 중국의 자기 제작기술이 가장 먼저 전래된 곳이 바로 고려였다. 이 고려에서 세계 최초로 그 유명한 상감청자를 만든다. 그래서 1123년 고려의 수도 개경을 방문했던 북송의 화가 서긍은 훗날 그의 여행기 <고려도경>에서 고려청자의 비색을 크게 칭송하게 된 것이다. 또한 남송시대 태평 노인이 작성한 골동품 수집목록<수중금>의 명품 목록에도 고려청자의 비색을 꼽고 있다.
  이시기 일본에서도 중국문화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그 대표적인 유적이 요안지 정원이다. 이 료안지의 정원은 선종의 영향으로 만들어졌으며, 이 선종과 함께 다문화가 발전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을 자기를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극도로 중국의 다완에 심취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송나라가 양쯔강 이남으로 내려와 남송(南宋)이 되며, 룽취안, 즉 용천이 남송의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도시였다. 남송 시대의 유약기술은 더욱 발전하여 여러 차례 유약을 입히고 소성도 여러차레 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함으로서 더욱 푸른빛이 나는 청자를 만들 수 있게 된다. 용천 청자에 이르러 청자는 완성된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 완성과 함께  대량생산 체제로 갖추어 연간 천만 개 이상의 도자기를 제작하게 된다. 1000년 전의 동아시아는 이 세계에서 가장 문명이 발달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수송도 육로보다 해상으로 바뀌는 데 배한 척의 수송량이 낙타 2000마리 분이었기 때문이다.   
 
4.
  1240년, 동 유럽 헝가리의 무히 마을에서 6만 명의 헝가리 군사가 전멸한다. 몽골기마병의 침략 때문이었다. 몽골기마병은 총 3만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믿을 수 없는 기동력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정복했다. 그들의 지나치는 곳은 언제나 공포와 학살이 엄습했다.
이처럼 몽골제국은 말위에서 건설한 제국이었으나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었다. 이에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중국을 중심으로 원 제국을 건설한다. 그리고 중국을 다스리기 위해 색목인을 관리로 등용한다. 중국엔 당나라 때부터 서역에서 온 색목인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원대에는 1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색목인이 살았다.   
  몽골인들은 흰색을 숭배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어머니의 흰 젖보다 더 선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 때문에 몽골 지배하의 중국에서는 백자가 주요 도자기가 된다. 이른바 ‘추부 백자’의 탄생이다. 이를 계기로 중국의 청자는 백자로 바뀌게 된다. 그 중심지는 징더젠(景德鎭)이었다. 이 징더젠의 고령산에서 도자기 원료인 흙이 채취되었다.(도자기의 원료를 고령토라고 하는 것도 이 산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이 고령토는 화강암의 풍화작용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고령토는 단지 흙이 아니다. 원석을 가루로 빻아서 만드는 것이다. 이 고령토의 주 성분은 석영, 장석, 점토다. 바로 이 고령토로 백자를 만들게 되었으며, 초기에는 청백자였으나 1351년 마침내 눈부시게 흰 순백자를 만들게 된다.
  백자는 ‘블루 엔 화이트’ 청화백자의 탄생을 통해 또 하나의 기술정점에 도달한다. 그것은 중국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융합의 산물이었다. 
  이란의 이스파한은 블루 모스크로 유명하다. 이슬람에서 푸른 색은 물을 상징한다. 푸른색 안료의 원료는 코발트다.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견딜 수 있는 안료는 철, 코발트, 동 이 세 가지 밖에 없다. 동아시아에서 이른바 ‘회청(回靑)’이라고 했던 코발트는 불의 온도에 따라 색깔이 달랐다. 1300도에 이르러야 선명한 청색을 띠게 된다. 
  그러나 페르시아에선 청화백자를 만들지 못한다. 그 지역의 흙은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화백자는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다. 이슬람과 중국 문명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성취가 청화백자인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문양은 당초문이었다.
  이 당초문의 기원은 이집트의 룩소르 신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무덤 안에 포도 넝쿨을 그렸는데, 이는 주인의 영성을 기도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로 전해져 에릭테이온 신전에서 볼 수 있듯, 넝쿨무늬로 형상화 된다. 이는 생명을 상징한다.
   이 그리스 문명이 로마로 이어지고 이슬람은 후기 로마 문명의 유산을 이어받는다. 이것이 요르단 마다바에서 볼 수 있는 모세의 성당과 이란 이스파한 블루 모스크의 기하학적 문양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당초문의 기원이다. 이것은 불교와 함께 중국에 전래된다. 그래서 당초문은 청화백자의 대표 문양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유목민족인 이슬람 문명권으로 수출된다. 
  15세기까지 인류문명의 전달자는 유목민족이었다. 이 유목민족들은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오늘도 전 세계인의 40%는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이 유목민족들의 그릇도 점차 청화백자로 바뀌어 간다. 그것은 터키의 세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터키의 세밀화를 보면 터키에서 커피가 얼마나 성행했는지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 세밀화에 그려진 커피 잔은 모두 청화백자다. 음식이 담긴 큰 그릇도 모두 청화백자다. 이것은 중국의 징더젠에서 주문 생산한 것이다.
  14세기 중 후반, 중국에서는 원 제국이 멸망하고 명나라가 건국된다. 이 명나라의 세 번째 황제는 영락제였다. 이 영락제때 정화(鄭和)는 150척(때에 따라서는 300여척)에 이르는 대 선단을 이끌고 먼 항해 길을 떠난다. 일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세계에서 이보다 더 큰 선단은 없었다. 주선의 길이는 150m, 무게는 8000톤, 승무원이 하루 소비하는 쌀은 100가마였다.    정화는 이 150척의 대 선단을 이끌고 1405년부터 1433년까지 28년간 7차례에 걸쳐 아프리카까지 여행한다. 18만 5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유럽 인들이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된 것은 이로부터 50년이나 지난 다음의 일이다.) 
  정화의 원정은 외교적인 목적을 가진 원정대였다. 이를테면 당대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었던 명나라의 하사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청화백자와 비단이 주된 하사품이었다. 당대 명나라는 유라시아의 바다를 지배한 것이다.
정화의 대선단은 아프리카 케냐의 말린디에도 도착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청화 백자의 유물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청화백자는 중국이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상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이란 알다빌, 왕들의 무덤 내부에서도 이 청화백자를 볼 수 있다. 커다란 진열장 같은 모습의 무덤 내부엔 압바스 1세를 비롯한 왕들이 신에게 바친 유물이 진열되어 있다. 바로 청화백자들이다.
5.
  13세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는 수상도시로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개무역도시로서 유럽의 중심지였다. 1272년 17세 소년인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간다.  그 경로는 터기→ 이란→ 타클라마칸 사막→ 중국이었으며,  당시 원의 황제인 쿠빌라이칸을 만났으며, 직접 중국을 보고 느끼게 된다. 당시 중국의 항조우는 인구 100만으로 베네치아의 7배 규모의 도시였다. 후추는 물론, 그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자기 그릇은 놀라운 물건이었다. 그의 『동방견문록』에 기록된  아시아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유럽인들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래서 처음엔 마르코 폴로를 ‘허풍장이’정도로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14세기 폰트힐 베이스(현재 아일랜드 박물관 소장)라는 중국 자기가 유럽에 최초로 전해지면서 유럽인들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믿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15세기 유럽의 식탁을 그려놓은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 당시 유럽에서는 유리잔과 주석 접시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로마에서 유래한 것으로 로마는 천년 이상 변화가 없이 고립된 세계였던 것이다. 
  새로운 로마는 비잔틴 제국에 의해 함락된다. 이 비잔틴 제국을 상징하는 것이 성 소피아 성당이다. 천 년 이상의 비잔틴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오스만 투르크의 메호메드 2세였다. 그는 15만 군대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다. 콘스탄티노플은 유라시아 대륙의 길목으로 중개무역을 독점했다.
  메호메드 황제는 중국자기로 식사를 했다. 그것은 최상의 청화백자였다. 당시 접시 한 개는 은33냥이었으며, 대형 항아리는 100냥 이었는데, 이 돈은 쌀 200석을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는 명나라였다. 청화백자는 명 황실의 백자였으며, 징더젠에서 생산되었다. 징더젠에서는 작업의 세분화가 이루어져, 유약 담당, 물레 담당으로 전문화되며, 가마의 대형화로 중국 자기 산업의 메카가 된다. 
  그런데 포르투갈에서는 아시아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봉쇄되면서 새 항로를 찾게 된다.
이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엥리케 왕자에 의한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 발견으로 이어지며 이로써 마침내 인도로 가는 항로가 열리게 된다.
  1497년 당시 28세인 바스코 다가마는 탐험대장으로 170명의 선원과 4척의 배를 이끌고 리스본을 출발하여 약 10개월 후인 1498년, 포르투칼 사람들인 바스코 다 가마 일행은 인도의 남서부 도시인 캘리컷에 도착한다. 후추를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세계 무역에 유럽이 마지막으로 동참한 것이다.
  이들은 1557년 중국의 마카오에 주둔지를 건설하게 된다. 이들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청화백자는 유럽에 전해진다. 유럽 서남부 리베리아 반도로 무역 주도권이 옮겨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산토스 궁전의 천장은 온통 청화백자 접시로 치장된다.
  포르투갈에 의해 인도양을 빼앗긴 스페인은 대서양을 건넜다. 1492년 스페인의 코르테스는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것이다. 코르테스는 1521년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다.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은광을 발견하여 수은 아말감 기법으로 순도 높은 은을 생산하게 되는데 당시 아메리카 은의 1/3을 중국에서 유입하게 된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16세기 명왕조 때 건설된 것으로 명은 무역을 통ㄹ해 들어오는 은화로 만리장서을 쌓는 재정을 충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만리장성을 은궤의 무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청화백자를 수출한 대가 였다.
  명의 선덕제는 자기로 황실의 권위를 세웠다. 그릇 밑에다 황제의 명을 쓰게 한 것이다. 이것이 세계 역사상 최초의 브랜드다. 황제를 위한 도자기 한 점을 위해 100점을 생산해야 했다. 즉 100개 가운데 한 개를 골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청화백자들은 황실 소속 화가들이 직접 그린 것이다. 
 
  멕시코의 아카폴코는 태평양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로 16세기 최대 무역항 중의 하나였다. 이 항구에서 다량의 은괴를 싣고 필리핀 마닐라로 출항했다. 그리고 중국 남부 푸젠성에서 온 상인들이 마닐라에서 이 멕시코에서 온 배를 기다렸다. 
16세기에 중국의 청화백자를 소유함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18세기까지 자기는 멕시코에서 보석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지금도 카리브해 바다 속에서 수많은 청화백자가 발견된다. 당시 스페인에서 스페인으로 가려던 배가 산호초지역에서 절반 이상 침몰되었던 흔적이다.
  그런데 17세기부터 아시아 무역의 주역이 네덜란드로 바뀐다. 지금도 암스테르담에 있는 동인도회사의 본부가 그 거점이었다. 이들 네덜란드 상인들은 남아공화국 케이프타운을 돌아 중국으로 왔다. 17~ 18세기 약 6000만점의 도자기를 수입한다. 400년 전 도자기는 유럽이 중국을 바라보는 창이었다. 도자기에 그려진 인물과 풍경은 동양에 대한 흥미를 유발한다. 이 때 유럽의 모든 궁전은 중국의 자기 방이 있었다. 500년전 이 세계는 청화의 제국이었던 것이다.
  15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는 인간의 사고나 창의력에 자신감을 드러내며, 특히 문화와 미술이 발달한다. 변혁의 출발점은 그리스 고전의 번역과 필사본이었다. 단테의 신곡은 인문주의 정신을 잘 구현한 것으로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렸다. 인간의 감성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인문학의 발달은 인간의 몸과 식물학, 동물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르네상스의 가장 빛나는 성과를 이룬 분야는 미술 분야였다. 우피치 미술관은 르네상스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르네상스시대의 그림은 균형과 조화 원근법을 드러내며.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정면으로 바라보는 나부를 그리고 있다.
  메디치 가문은 고리대금업으로 출발해 피렌체 최고의 부자가 된다. 당시 이들은 문화인들을 후원했으며 그래서 당시 화가들이 그린 성화에 메디치가의 사람들이 숨어있을 정도이다.    이 메디치가의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이집트인이 수 점의 도자기를 선물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로렌초 데 메디치는 약 400점의 중국 도자기를 수집하게 된다.
  그래서 1575년 유럽 최초로 자기생산을 시도한다. 르네상스의 지식을 총동원 흰색을 낼 수 있는 온갖 재료를 총동원, 과학자와 도공들을 모아서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난다. 도전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도기를 식기로 썼다. 스페인 알람브라 궁전에는 이러한 유적은 이슬람인들이 15세기까지 이 곳에서 살았다는 흔적이다. 이들은 이스파스 모레스크란 도기제작기술을 남기고 갔다. 이 도기 기술이 유럽 전역으로 퍼진다.
네덜란드 델프트 도기는 중국의 청화백자를 모방하면서 시작한다. 델프트 시민들이 화재로 불탄 도시를 재건하면서 도기공장을 세운 것이다. 유럽 도자기 생산의 중심지가 된다. 철저하게 중국 청화백자를 모방한다. 그러나 도기 기술에 머문다. 모양은 비슷해도 17세기 중국 도자기가 10배 이상 비싸게 팔렸다.         
6.
  164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중국에서 일어난 명과 청의 전쟁 때문에 도자기 수입을 할 수 없게 된다. 대륙 밖으로 쫓겨난 반란군이 바다에 머무는 것을 막기 위해 해상봉쇄령을 내렸던 것이다. 또한 징더젠은 오삼계의 난으로 파괴된다. 그래서 네덜란드에서는 새로운 도자기를 찾아 나선다.
  이들은 17세기 후반 일본 큐슈의 나가사키에 도착한다. 당시 나가사키는 중국, 일본 네덜란드 상인이 몰려들어 새로운 무역 중심지가 된다. 네덜란드는 1659년 19월 일본에 도자기 5만점 수입 신청서로 주문하게 된다.   
  일본의 다이도쿠지(大德寺)에는 국보로 지정된 다완이 있다. 평상시 일곱 개의 오동나무 상자에 담겨 있으며, 내부가 우물을 닮아 이도다완(정식 명칭는 기자에몬이도喜左衛門井戶임)으로 불리는 이 다완은 16세기 이전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도 다완은 야나기 무네요시 때문에 한 때 조선의 막사발로 오해되었지만, 막사발은 아니다. 이 일본의 국보와 비슷한 이도다완은 현재 전 세계에 일본에만 100여개가 남아 있다. 이도다완은 전국시대 무사들의 최고의 애호품이었다. 그래서 이도다완과 자신의 성을 바꾼 영주도 있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이도다완의 애호자였다. 16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국제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은 결국 도자기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세계 도자기사에서 조선과 일본의 운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이 세계에서 중국을 제외하고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베트남 뿐 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견줄 정도의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곳은 조선 밖에 없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중 1000명의 도공이 일본에 붙잡혀 간다. 이 숫자는 당시 조선 고급 도자공의 거의 전부였다. 그래서 조선의 자기 생산기반은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무너지며 이후 조선의 도자 기술은 급속히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광해군 때는 제례에 올리는 술잔조차 만들지 못하게 된다. 
  일본 큐슈에는 지금도 유명한 도자기 생산도시 아리타가 있다. 아리타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 이삼평이 큐슈 전역을 헤매다 20년에 만에 최초로 고령토를 발굴 하면서 생긴 도시다. (일본 큐슈 이마리에서는 조선도공의 비가 있다.)
  그래서 조선 도공 이삼평에 의해 1616년 처음으로 일본에서 도자기가 구워졌다. 영주들의 각별한 후원 하에 직인별로 역할이 분업화, 전문화하면서, 이로부터 불과 30년 만에 유럽의 주문을 받을 만큼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성장한다. 중국의 도자 산업 공백을 틈타 단숨에 세계 초고의 자기 생산국이 된 것이다. 이는 조선 도공의 기술과 중국의 가마 기술이 합쳐서 가능했다.
  그 중에서도 가케에몽 도자기가 유명한 데, 이는 붉은 색 문양의 도자기로 일본이 세계 최초로 만든 것이다. 이 붉은 색 문양은 유산철 가루로 그린다. 이것은 10년 이상 산화된 철로, 오래 산화할수록 색이 선명하고 고우며 계속 갈수록 더 고와진다. (그래서 할아버지 대에  만들어진 산화철을 계속 갈아서 손자 대에 쓰기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중국에서도 이미 명나라 때 채색도자기를 만들었으며 이것이 ‘두채 자기’다. 이 두채자기는 코발트로 윤곽을 그리고 1300도로 구운 후 다시 유약 위에 그리고 1000도로 두 번 구워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채색자기를 꽃피운 것은 일본이다.
  그리고 백자의 흰색도 일본에서 더욱 희게 된다. 이 자기의 흰색 바탕, 부드러운 흰색은 산소가 부족한 상태에서 불완전 연소를 계속해야 한다. 그런데 일본은 바로 17세기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가장 순도 높은 흰색 도자기를 만든 것이다.
  결국 불과 50년 만에 일본에서는 조선은 물론 중국을 능가하는 일본화 된 자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17세기 중엽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유럽으로 수출되는데 백년간, 약 370만점의 도자기를 수출한다. 이때부터 중국 징더젠의 자기가 일본을 모방하는 역전 현상이 생긴다. 그래서 이 도자기를 ‘차이니즈 이마리’라 불렀다.
  당시 유럽은 세계 무역을 통해 부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이 즐기는 최고의 호사는 중국식 옷, 아프리카의 커피, 아메리카의 담배였다. 커피는 손잡이가 있는 중국도자기에, 차를 따르는 다기는 일본도자기였다.
  17세기까지 유럽에는 개인 접시를 쓰지 않았다. 나이프는 있었으나 포크는 없었다. 유럽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중국에 주문했다. 17세기 무렵 중국은 약 7000만점이나 되는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했기 때문에 중국은 심지어 “도자기를 앞세운 착취자” 로 인식되기도 했다. 아직은 중국과 일본이 여전히 세계에서 도자기를 수출하는 유일한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유럽은 마침내 도자기를 만들게 된다.     
7.
  18세기 유럽은 400여개국의 크고 작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독일 중부 작센 왕국도 이러한 나라 중의 하나로 스웨덴과 전쟁을 치르면서 군자금 마련에 고심하다가, 1700년대 초 독일의 마이센 알브레이츠부르크성에서 당시 왕이 연금술사인 뵈트커에게 엄중한 감시 속에서 금을 만들라는 명을 내려 실험을 거듭했지만 실패하자, 도자기를 만들라고 하게 된다. 당시 유럽에서 도자기도 금만큼 귀중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뵈트커는 대리석과 뼛가루로 실험했지만 실패를 거듭한다.
  그러다가 1708년 카올린, 즉 고령토 광산을 발견한다. 그래서 오랜 실험 끝에 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의 성분비를 과학적 실험과 분석으로 부족한 것이 장석임을 알게 된다. 흙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그리고 치른하우스라는 과학자를 통해 ‘고온'에 도달하는 방법을  알게 됨으로써 1710년, 마침내 유럽 최초의 백자 도자기를 만들어낸다. 뵈트거의 도자기는 과학적 실험과 분석의 결과물로서 중국 도공과 달리 실험과 실험착오를 기록으로 남긴다. 그 후 1716년 물감을 만들던 조수들인 흉거 일행이 그 성에서 탈출하여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한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이 여왕의 비호 하에 그들은 아우가르텐 도자기를 제작함으로써 도자기 제조 기술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더욱 더 고품질의 도자기를 만들게 된다. 
  그래서 독일의 마이센 도자기는 다른 유럽의 도작기와 구별하기 위해 쌍 검을 도자기에 그림으로써 상징으로 삼는다.  그리고 17세기 중반부터 이 마이센 도자기는 중국제 도자기보다 높은 가격에 팔린다. 특히 자기 인형은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데 ,이는 일본의 가케에몽 도자기의 모방품이었다. 이 때까지는 자신들의 독창적인 문양을 만들지 못한 것이다.
  17세기 프랑스는 중앙집권적 군주제국가로서 루이 14세가 프랑스 예술가를 총동원하여 만든 베르사이유 궁전이 유명했으며, 당시 프랑스는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다. 루이 14세는 중국 자기의 애호가였다. 그리고 그의 총비 퐁파두르 부인은 프랑스 자기 생산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래서 프랑스 세브르에서 유럽양식의 도자기가 완성된다. 이는 금빛과 ‘로얄 블루’로 이루어진 도자기다.
  이후 유럽의 도자기의 발달사는 독일 마이센과 프랑스 세브르의 경쟁의 역사가 된다. 사실화와 금채를 장식한 유럽양식이 탄생한다. 그래서 1800년대에 들어와 유럽의 도자기는 중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발전한다. 유럽은 아시아에 대한 오랫동안의 열등감에서 비로소 벗어난 것이다.
  1748년 이탈리아에서 폼페이 발굴이 이루어진다. 이를 계기로 로마 붐이 일어난다. 그래서 신고전주의 운동이 일어나며, 영국 중서부에서 스톡 온 레트에서 자기도 로마의 고대문양을 부조로 붙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제스퍼 웨어란 자기다. 이 자기는 유럽의 자기를 상징한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찰스 다아윈의 할아버지이자 의사인 에라스무스 다아윈, 산소를 발견한 프린스턴,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에 의해 영국은 산업 혁명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특히 증기기관의 도입으로 운송시스템과 생산의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뀐다. 즉 대량생산체제를 갖게 된 것이다. 곧이어 모든 산업은 전문화, 분업화하는데 자기 산업이 산업혁명의 선두였다. 흙을 빻는 것을 기계가 담당하면서 도자기 공장수가 급격하게 늘어난다. 그래서 유럽 사회의 생산 시스템을 바꾸어 놓았다.
  이후 영국 도자기는 세계도자기의 표준이 된다. 도자산업의 발달도 가속화되어, 인쇄된 문양을 이용하는 전사기법 등을 사용하게 된다. 이어 영국에서는 기술 개발을 계속, 자기의 소재를 바꾼 에트루스칸 본차이나를 만들게 된다.  이 본차이나는 도자기의 재료로 소뼈를 사용하게 되며, 이 뼈를 섞은 흙은 1100도에서도 자화가 이루어지고 충격에도 강해진다. 뼈의 성분이 도자기의 재질을 변화시킨 것이다. 이로써 재료공학의 역사가 시작된다.
  기술 발달로 이처럼 고급 도자기를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며, 자기의 공급은 수요를 넘어선다. 그래서 싼 값에 팔리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마케팅 전략이 생겨난다. 이 마케팅은 적극적  판촉 활동으로 매장에 진열품을 놓는 것이었다. 이것이 주문 받지 않은 상품을 판매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그래서 식탁도 변화하며, 이 때부터 유럽에서 자기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그릇이 된 것이다. 18세기 유럽과 아시아는 명암이 엇갈린 것이다. 중국이 성장을 멈춘 사이 영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떠올랐다.
       
  1851년 런던에서 제1회 만국 박람회가 개최되어 17000여점이 전시되는데 자기는 여전이 첨단제품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지만 일본 도자기는 19세기 말에도 여전히 그 성가를 유지한다. 1876년 필라델피아 만국 박람회에 일본은 큐슈의 아리타의 도자기를 출품한다. 이 지역의 영주들은 자기를 팔아서 부국강병의 자금으로 삼으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자금을 축적, 큐슈의 영주들이 나중에 일본을 근대화시킨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된다.
  그리고 이때 도자기를 포장한 종이가 일본의 채색 목판화인 우키요에였는데, 클로드 모네와 빈센트 반 고흐는 이 일본의 채색 목판화에 심취한다.  그래서 모네는 지베르니에 일본식 정원을 만들어 놓고 만년을 그 곳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다. 반 고흐는 일본의 안도 히로시게의 목판화들을 그대로 베끼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유럽에서 일본 열풍, 즉 자포니즘이 성행했으며 이 때 유럽은 일본으로부터 ‘간결함’과 ‘단순함’의 미학을 배웠다.
  20세기에 들어서 도자기 산업은 더욱 발전, 각종 생활 용품 전반으로 확산되어 대량생산된다. 그릇 뿐 만 아니라, 심지어 소변기까지 공장에서 도자기술로 제작된 것이다. 그래서 1917년, 마르셀 뒤샹이 이 소변기를 하나를 익명으로 선택하고 제시하게 되며, 이는 이전까지 서구적 미의식을 일거에 전환시키는 일대 미술사적 사건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오늘날 일본의 영빈관에서는 1460도에서 구운 세계에서 가장 순도 높은 백색 도자기를 사용한다. 프랑스에선 대통령 공식만찬에 세브르 자기를 사용한다. 그리고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할 때 반드시 이 자기를 가져간다고 한다. 영국의 로얄 칭호의 도자기를 가장 많이 가진 나라다. 이처럼 여전히 도자기는 국가 브랜드로서 국가의 문화적 자존심을 대변한다.
  반면에 우리의 도자기 문화는 이와 대비된다. 알다시피 이 땅에서는 고려 때부터 전세계에서 중국과 대등한 수준의 세계 최고의 도자기를 만들었다. 특히 백자와 청자 사이에 있는 분청사기는 전세계적으로도 그 유례가 없는 가장 우리나라의 특색이 두드러지는 도자기다. 특히 무심한 듯 빚은 대범함과  파격적으로 대담한 철화 그림들은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아도 놀라운 예술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당시 수준급의 도자공들 거의 전부가 일본에 끌려가버린다. 이로부터  우리나라 도자기의 명맥은 급격하게 쇠퇴한다. 이는 오늘날 이천이나 인사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잡한 재현도자기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8.
  도자기의 변천사는 곧 동서 문명의 교류사다. 당초문은 자기에 담겨있는 가장 오래된 문명교류의 증거였다. 가장 흔한 재료로 가장 귀한 자기를 만들고자 했으나 쉽게 도달할 수 없었다. 여러 문명은 놀라운 지혜로 자기를 발전시킨다.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도자기는 대륙과 대양을 건너 문명의 교류를 촉진하는 가장 오랜 세계의 교역품이자 하이테크 상품이었다.
  13세기에 탄생한 유라시아 대제국은 중국 자기에 이슬람 제국의 흔적을 남겼다. 청화백자는 중국과 유럽에 의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중국의 청화백자는 다시 한번 동경의 대상이 된다.
  모두 자기의 생산자가 되고자 했다. 일본은 조선의 기술을 얻고자 전쟁을 일으켰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유럽에서는 자기들의 방식으로 자기생산에 성공했으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
  문명의 전파에는 중단 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연파(延播)와 여기저기서 점점이 이루어지는 점파(點播)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이 중 연파는 전파의 연속성이 보장된 가장 확실한 교류 현상이다.
  청화백자의 가장 두드러진 문양인 당초문은 이집트 무덤에서 시작되어 그리스 로마를 거쳐 이슬람 문화와 융합되어 이어지면서 마침내 가장 완숙된 중국 청화백자의 주된 문양으로 탄생한다. 이런 맥락에서 당초문은 자기에 담겨있는 가장 오래된 문명 교류의 흔적이다. 13세기 유라시아 대제국은 청화백자를 만들게 했다. 이 청화백자는 중국과 유럽에 의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유럽의 성공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세라믹은 오늘날 통신 수단의 핵심재료가 되고 있다. 그래서 도조 예술과 최첨단 우주산업으로 이어진다. 우주선이 대기권에 진입할 때 1800°C의 고온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견딜 수 있는 것은 도자기 밖에 없다. 왕복 우주선인 컬럼비아호의 몸체는 도자기다. 도자기의 역사는 인류의 모든 지혜가 발휘된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누가 말했다. 현대의 우주선을 만드는 일과 도자기를 만드는 일은 같은 것이라고. 
                                    2004년  12월 15일         글 / 도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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