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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빚
2004년 11월 21일 부정선거를 외치면서 거리로 쏟아져나온 젊은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백만 원군이 되어준 것은 BBC를 포함한 서방 언론의 뜨거운 관심이었다. 서방 언론은 정규 방송을 중단하면서까지 키예프에서 벌어지는 반정부 시위를 '오렌지 혁명'으로 대서특필했다.
그날은 우크라이나 대선 결선 투표가 있었던 날이었다. 10월 31일에 있었던 대선에서 빅토르 야누코비치 후보는 39.2%, 친서방 성향의 빅토로 유슈첸코 후보는 39.87%를 얻어 양쪽 다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여 결선 투표를 벌인 것이다. 그런데 결선 투표에서 야누코비치가 3% 차이로 승리한 것으로 나오자 유슈첸코 지지 세력은 선거 전의 여론조사에서 유슈첸코가 11%까지 앞서는 것으로 나왔다면서 이것은 명백한 부정선거라면서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유슈첸코는 지지자들 앞에서 대통령 취임 선서까지 했다.
야누코비치 쪽에서는 선거 전의 여론조사는 미디어를 장악한 유슈첸코 측의 조작이며 1차 대선 투표에서 우크라이나사회당과 우크라이나공산당이 얻은 표가 각각 5.82%와 4.97%인데 이들은 모두 잠재적 야누코비치 지지자였다면서 승리는 당연한 결과라고 반박했지만 서방 언론의 압도적 지지를 등에 업은 유슈첸코의 부정선거 규탄 여론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우크라이나대법원은 결선 투표를 다시 하기로 결정했다. 야누코비치 지지자들은 분리 독립을 주장하면서 강하게 반발했지만 야누코비치는 "나는 내전으로 엄마가 자식을 잃고 아내가 남편을 잃고 키예프에서 시체가 드네프르 강으로 떠내려가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피를 통해 집권하고 싶지 않다"면서 재투표를 수용했다.
서방 언론의 집중적 관심을 받으면서 이듬해 시행된 결선 재투표에서 친서방 후보 유슈첸코는 52%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오렌지 혁명의 와중에서 벌어진 헌법 개정으로 우크라이나 권력의 중심은 대통령이 아니라 의회와 총리에게 돌아갔고 유슈첸코가 당초 파트너로 영입한 율리아 티모셴코는 미모와 젊음을 앞세워 유슈첸코를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러시아도 자원을 무기로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부를 옥죄었다. 러시아는 2006년, 2008년, 2009년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일시적으로 끊었다.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들어오는 천연가스의 80%는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므로 우크라이나에 천연가스를 끊는다는 것은 유럽에 천연가스 공급을 끊는다는 뜻이었다. 난방의 대부분을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기대는 유럽은 점점 러시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올해 선거에서 야누코비치는 결선 투표에서 티모셴코를 누르고 정권을 되찾았다. 티모셴코는 6년 전처럼 부정선거라고 규탄하면서 오렌지 혁명 바람을 다시 일으켜보려고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여론은 냉랭하다. 유럽도 차갑다.
6년 전만 하더라도 유럽은 유럽연합 확산 분위기에 들떠서 오렌지 혁명을 예찬하고 홍보하는 데 앞장섰지만 경제 위기 속에서 자원 부국 러시아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에서는 빚더미에 앉은 가난한 나라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에 들어오는 것을 오히려 꺼리는 분위기다. 우크라이나는 연간 재정적자가 GDP의 10%를 넘어 국가 부도 직전에 몰려 있다. 그러나 IMF 말고는 러시아도 유럽도 우크라이나를 도울 마음이 없다.
우크라이나의 빚은 우크라이나의 손으로 갚을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는 외로운 나라다. 외로운 나라일수록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중심을 지키면서 자기 이익을 지켜야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유럽에 올인했다가 낭패를 보았다. 우크라이나는 자신을 유럽이라고 생각했지만 유럽은 우크라이나를 진정한 유럽으로 여기지 않았다. 유럽에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리스의 빚
우크라이나에 비하면 그리스는 행복한 나라다. 그리스는 국가 총부채가 GDP의 100%가 넘고 예산 적자 규모도 연간 GDP의 12.7%로 심각한 수준이다. 유럽연합은 회원국에게 국가 부채를 GDP의 60% 아래로 묶고 예산 적자도 3% 미만으로 묶어야 한다는 지침을 내리고 있으니 그리스의 빚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그리스가 행복한 이유는 유럽연합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가 파산할 경우 유럽 통합의 상징인 유로화가 불신을 받고 유로화가 흔들리면 유럽연합이 흔들리기 때문에 프랑스와 독일 같은 경제 대국은 그리스의 어려운 처지를 나 몰라라 할 수 없다. IMF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의 입김이 강한 IMF에게 유럽연합 회원국의 구제를 맡기는 것은 유럽연합의 실패를 자인하는 셈이고 이것은 유럽 통합에 암운을 드리울 수 있다. 그래서 유럽연합은 그리스를 지원하려고 한다.
대신 그리스 정부에 공무원 임금 삭감과 자영업자의 탈세 단속 강화와 증세를 통한 적자 축소를 요구한다. 그리스는 관료주의와 부패가 심한 나라다. 그리스 국민이 매년 뇌물로 공무원에게 주는 돈이 평균 1700유로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나라빚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공무원 연금이다. OECD의 법정 퇴직 연령이 평균 64세고 노르웨이 같은 나라는 67세까지 올라가는데 그리스는 58세고 또 조기퇴직자에 대한 혜택이 지나치게 크다. 이것은 고스란히 나라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사실 공무원 연금 문제가 가장 심각한 나라는 한국이다. 한국 공무원은 퇴직전 임금의 76%를 연금으로 받는다. 영국이 67%고 그리스가 69%, 복지국가라는 노르웨이는 66%, 핀란드는 60%밖에 안 된다. 이것은 한국 공무원이 일반 국민보다 지나치게 많은 혜택을 받는다는 소리다. 한국의 공무원 연금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앞으로 10년 뒤면 40조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유시민 복지부장관이 연금 개혁을 위해 동분서주할 때 진보와 보수는 모두 나 몰라라 하면서 뒤에서 침만 뱉었다. 한국 진보에게 노동자는 신성불가침한 성역이기 때문이고 한국 보수는 오직 눈앞의 사익만을 추구할 뿐 후손의 미래 따위는 안중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주인 의식 없는 한국 진보와 한국 보수가 주인 의식을 가지고 지속가능한 번영의 길로 나라를 이끌고 가려던 노무현을 죽였다.
그리스 정부도 앞으로 3년 안에 재정 적자를 3% 미만으로 떨어뜨리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얼마 전에 집권한 사회당 정부가 노동자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긴축 예산을 관철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벌써부터 사회당 정부는 노동자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듣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국민이 자구 노력을 보여주지 않을 경우 독일, 네덜란드, 핀란드 같은 유럽연합의 모범생들이 언제까지나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실업률이 올라가면 자국 실업자도 못 챙기면서 왜 다른 나라에 퍼주느냐는 극우 정치 세력의 입김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의 빚은 결국 그리스가 갚아야 할 빚이지만 그래도 유럽연합이라는 운명공동체가 같이 걱정을 해주니 외롭지는 않은 것일까.
미국의 빚
그런데 사실 예산 적자 규모로 보았을 때 가장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나라는 미국이다. GDP 대비 국가 부채는 200%를 돌파한 일본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일본의 빚은 다른 나라에게 진 빚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일본 국민에게 진 빚이다. 일본 국민이 일본 정부를 믿고 일본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을 계속해서 사주면 당분간은 버틸 수가 있다.
그러나 미국의 빚은 그렇지가 않다. 적자를 메꾸기 위해서 미국 재무부가 발행하는 채권은 미국 국민이 아니라 주로 중국, 일본, 한국처럼 미국에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들이 산다. 2009년 9월 현재 중국이 보유한 미국 채권은 8천억달러, 일본 보유분은 7500억달러, 한국 보유분은 376억달러다. 미국이 막대한 재정 적자에도 어려움을 겪지 않은 것은 미국 채권을 외국에서 믿고 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안을 느낀 중국은 해마다 사들이는 미국 채권 규모를 급격히 줄여가고 있다.
미국 채권이 외면받으면 미국은 이자를 더 많이 쳐주어야 하고 이렇게 되면 빚이 더욱 늘어나는 악순환으로 빠져든다. 미국의 예산 적자는 작년에 GDP 대비 86%를 돌파한 데 이어 올해 말에는 98%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의 보수적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에 따르면 국가 부채가 GDP의 90%를 넘어서는 나라가 파산 선고를 받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사실이 통계적으로 입증되었고 아무리 큰 나라도 거기서 예외일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미국은 달러를 찍어낼 수 있고 또 물건을 왕성하게 소비해주는 미국 같은 나라가 건재해야 자본주의 체제가 굴러간다고 자신하면서 크게 걱정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달러를 찍어내서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다른 나라들은 인플레로 똥값이 될 미국 채권을 기피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국은 돈이 없어서 석유를 수입하지 못하는 사태를 맞이하지 말란 법이 없다. 석유가 없으면 자동차만 못 굴리는 것이 아니라 농업도 붕괴한다. 공산권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북한에서 아사자가 속출한 것은 북한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기름이 없어서 농사를 못 지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무능한 것은 천문학적 재정 적자의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소수 부자들에게 장악당하여 근본적 개혁을 하지 못하는 미국 같은 나라다.
그리스는 나라빚이 GDP의 100%가 넘는데도 IMF 신세를 지지 않았고 미국은 해마다 1조달러가 넘게 빚을 지는데도 걱정을 안 한다. 한국은 지난 97년 국가 부채가 65조원으로 GDP의 겨우 14.5%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도 IMF 사태를 맞았다. 한국이 얼마나 외로운 나라인지를 알 수 있다. 한국을 지켜줄 나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한국의 구세주는 한국 말고는 없다. 나의 구세주는 오직 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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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 정준영, 연합뉴스, 201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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